K-Classic News 원종섭 詩 칼럼니스트 |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시건설』 1939),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애비는 종이었다' 첫구절이 충격적이고 인상적입니다 천부의 시인 서정주가 스물세 살에 쓴 시입니다 국화옆에서, 귀촉도 , 동천, 푸르른 날 피와 본능과 운명을 격렬한 호흡으로 노래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
K-Classic News 원종섭 문학평론가 | 단단한 고요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 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체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 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 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 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 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2003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 창작과비평 redfox0579 섬세한 반응입니다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역설 물렁물렁한 묵 단단한 모습 작고 사소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인간과 반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감각 시인은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상상력입니다 쉽게 스쳐가는 일상의 작은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는 진지한 호기심이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관찰력 인간 위주로
K-Classic News 원종섭 문학평론가 | 묵화 墨畵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전집', 나남출판, 2005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겨납니다 시인은 화폭을 꽉 채워 그리지도 않고 요란스럽게 채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느낌도 들고 다 말하지 않은 여백도 느껴집니다 절제된 표현으로 여백의 미가 선명하게 살아납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생략하고 소와 할머니만을 압축해서 표현했습니다 관찰자 시점입니다 앞 부분과 뒷 부분이 도치되기도 했구요 독자들은 여백 뒤에 숨은 내용을 생각하며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은 격앙된 감정으로 말을 타고 달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의 성숙함은 서서히 굳어져 간 것이겠지요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의 어떤 심정 제목 '묵화'는 먹의 짙고 엷음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묵화는 절제된 그림이지요. 할머니와 소의 눈망울 애잔한 느낌의 공유로만 유대감이 표현될 뿐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이고 심심상인(心相印)이지요. 소가 먹는 물은 맹물이 아니고 쌀뜨물일 것입니다 하루종일 함께 고단한 노동을 한 소에게 할머